하판락 착혈귀신 친일 얼굴 및 하판락 근황과 후손 (feat.꼬꼬무)

 

인기리에 방영중인 SBS 꼬꼬무에서는 '58년만의 복수! 착혈귀를 찾아라' 편을 방영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씨의 막내아들 이상국씨는 당시 10대였던 아버지가 일제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과,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원수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꼬꼬무는 당시 이광우 씨에게 주사기로 고문당하는 사람의 몸을 여기저기 찔러 피를 뽑은 후 얼굴과 몸에 사정없이 뿌리는 이른바 착혈 고문을 실시한 최악의 일제 친일 경찰 하판락에 대해서 다시금 조명하였습니다. 이에 착혈귀라 불리는 고문왕 악질 친일 경찰 하판락에 대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착혈귀라 불렸던 고문왕 친일경찰 '하판락'
꼬꼬무를 통해 다시 한번 알려진 친일 경찰 착혈귀 하판락
하판락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이광우 독립운동가
착혈귀 하판락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이광우 독립운동가착혈귀 하판락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이광우 독립운동가착혈귀 하판락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이광우 독립운동가
착혈귀 하판락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이광우 독립운동가

 

 

착혈귀 하판락 일생 

악질중의 악질 친일 경찰 하판락의 일본식 이름은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입니다. 1912년 2월 15일 생으로 친일 악질 경찰로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는 2003년 9월 11일, 91세까지 천수를 누리다 죽었습니다.

 

하판락은 일제강점기의 고등계 경찰로, 1912년 명석면협의회원과 명석면학교비 평의원을 지낸 지역유지인 하한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판락의 형 하영락은 명석면 부면장을 지낸 면서기였고, 그의 동생 하충락은 일본유학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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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 착혈귀 하판락

 

하판락은 1934년부터 일제 경찰로 일하며 경남 지역의 독립 운동가를 색출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하판락은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이었습니다.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 였는데, 당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의 증언에 의하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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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과 더불어 악명 높은 친일경찰들

 

하판락은 자백을 강요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하고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를 향해 뿌린 후,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착혈 고문' 외에도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고,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순국하였고, 살아남은 이광우 등 은 고문으로 전원 신체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하판락은 광복 이후 해방후에도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그는 일본인들이 남기고간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1949년 1월 부산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게 체포되었지만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고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 발생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하판락은 서울에서 3회, 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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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경찰 하판락

 

 

하판락 근황 및 후손 

하판락은 석방 후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에 거주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재력을 바탕으로 제도정치권에 진입하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습니다. 

 

1956년 제2대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진양군 제1선거구에 입후보하여 출마했지만 그의 막강한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하판락을 기억하고 있던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습니다. 

 

 

그 후에도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하판락은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뜻을 두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신용금고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금융업자로 변신하는 한편,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돈으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진주 명석면 청사를 신축하는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고향을 빛낸 출향 인사로 변신했고, 부산에서는 어버이날에 부산시장의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화려하게 신분 세탁을 했지만 이후 이광우 독립운동가 아들 이상국씨로 부터 그의 악질적인 친일행적이 온 세상에 다 드러났지만 그는 91세로 천수를 다 누리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은 인터넷으로 이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불명확하며 현재 완전히 신분을 숨긴채 하판락이 벌어놓은 재산을 가지고 지금까지 숨어서 편안히 누리며 살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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